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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우주

항공우주의 역사 (1) - 비행 기계와 학자들

by FlIφEda 2022.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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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날고자 하는 인간의 꿈이 이루어진지 이제 겨우 100여 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간 수많은 사람들은 하늘을 날고자 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으나, 당시에는 산업기술의 발전이 뒷받침되지 못하여 거듭되는 실패만 반복되곤 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기술문명에 기반하여 합리적인 도전 및 시도가 이루어진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이어서 항공우주의 역사를 시대에 따라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비행 기계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꿈

서양에서는 흔히 16세기를 과학 혁명의 시대라고 칭합니다. 이에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는데, 바로 이 시기가 논리적으로 확실하게 검증되고 확인된 사실에 기반하여 다양한 체계를 쌓고 구축하는 과학적 방법론이 시작되는 시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과학적 사고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그중 대표적으로 우리가 가장 흔히 알고 있는 선구자로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수많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으나, 그중 항공 분야에서는 새의 해부를 통해 다음과 같은 의미 있는 결론을 이끌어냈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새들은 결국 수학적 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기계에 빗대어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새들의 모든 움직임과 운동능력은 과학과 기술을 통해 수치화시키고, 이를 인간의 능력을 통해 보다 구체화하여 궁극적인 기계화가 가능할 것이라 했습니다. 1505년에 발표된 다 빈치의 논문은 그 이후 시대의 동력비행기 및 활공기 관련 발명자들에게 큰 자신감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있었는데, 비록 다 빈치의 이론은 정확히 맞았지만 지상에서만 움직이고 행동하는 인간의 힘과 체중에 관련한 비율을 정량적으로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 빈치는 비행기와 관련하여 수많은 스케치를 남겼고, 또 그것을 기반으로 날개 달린 비행기 모형 또한 만들었습니다. 그가 남긴 스케치는 프로펠러를 사용하여 날 수 있다고 설명되어 있지만, 토크 상쇄 기능에 대한 개념조차 없던 시절이기에 그저 비행에 대한 다 빈치의 꿈을 담은 것이라 보입니다.

 

하지만 당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주장을 냉소적으로 비판한 학자도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생리학자이자 수학자이며, 동시에 천문학자이기도 한 조바니 알폰소 보렐리는 당시 신비롭게만 받아들이던 생물체의 현상을 과학에 기반하여 이해하려 한 대표 의물리학파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본인의 전문지식 분야로 익숙한 생리학과 수학을 사용해서 조류 날개의 움직임을 역학적으로 해석하여 설명하고자 하였고, 더 나아가 새의 근력과 몸무게 사이의 관계를 인간과 비교하며 오롯이 인력만으로는 비행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에는 인력 이외에는 엔진과 같은 대체 동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다 빈치 이후 수백 년 동안 인간의 비행에 대한 인류의 꿈은 그저 새의 비행 형태를 모방하는 정도의 수준에 멈춰 있었습니다.

 

조지 케일리라는 한 영국의 과학자는 날개에 관하여 과학적인 시선으로 접근해 분석을 진행하였으며, 그 결과 비행 기계의 날개를 위아래로 움직이지 않고서도 날 수 있음의 가능성을 시사했습니다. 조지 케일리는 1809년과 1810년에 걸쳐 발표한 ‘공중 비행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통해 하늘을 날 수 있는 항공기에 작용하는 네 가지 힘인 양력, 항력, 추력, 그리고 중량을 기반으로 한 비행이론을 처음 주장했습니다. 그중 양력 이론은 비행기가 뜨는 원리의 기반이 됩니다. 양력 이론을 쉽게 이해하기 위한 예시로, 실에 매단 연을 공중에 날리는 것을 떠올려보면 됩니다. 실에 매달린 연이 적절한 각도에서 맞바람을 받으면 위로 떠오르게 되는데, 바람이 약할 경우에는 바람 반대방향으로 거슬러 달리면 더 많은 양의 바람을 맞아 더욱 잘 날아오를 것입니다. 바람과 연이 받음각을 이루면 상대속도에 따라서 연에 공기력이 발생하게 됩니다. 조지 케일리는 바람과 연 사이에 발생된 이 공기력을 바람이 부는 방향과 평행을 이룰 때 항력이라 칭하고, 수직을 이룰 때 양력이라 칭했습니다. 그는 만약 이때 알맞은 동력, 즉 엔진의 힘을 사용해서 항력을 이기면 그때 발생되는 양력이 생기며, 이 양력이 중력을 이겨내면 공중을 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날개의 단면을 볼록한 유선형으로 만들어야 양력에 대한 항력이 증가하게 되고, 이를 끌어당기는 힘이 항력보다 더 크게 유지되면 지속적인 비행이 가능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그는 날개를 위아래로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고정형 날개를 사용한 비행의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그렇게 1800년대에 행해진 활공기에 관한 실험이 본격적으로 활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1889년 ‘항공기술의 기초로서 새의 비행’이라는 저서를 출판하고, 1890년부터 본격적인 활공 실험을 시작한 독일 항공의 개척자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오토 릴리엔탈이며, 그는 13세부터 48세에까지 총 35년 간 활공비행에 일생을 바쳤고, 그 결과 동력 비행으로 발전하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1891년에 릴리엔탈에 의해 제작된 초창기의 활공기는 10평방미터의 면적에 18kg의 무게를 갖추고 있었으며, 꼬리 부분에 수직 안정판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릴리엔탈은 활공기의 날개 중앙부에 구멍을 만들고, 그 구멍에 머리를 내민 채로 어깨, 팔, 무릎으로 활공기에 매달려 언덕 위에서부터 뛰어내려 활공을 시도하곤 하였습니다. 또한 활공 시 몸이 활공기에 매달려 있는 위치를 이동시키고 전반적인 무게중심을 바꿔주며 좌우로 자세를 조종하였습니다. 하지만 활공기의 공기력은 예상보다 훨씬 빠르고 컸기 때문에 사람이 몸을 이동시켜가며 무게중심을 잡아 수평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상당히 어려웠고, 그 결과 1896년에 릴리엔탈은 안타깝게도 활공 중 추락하여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해당 기간 동안 약 2,000회 이상 활공을 시도하였으며, 그의 평균 활공 거리는 400m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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