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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우주

우주 비행 개발의 기원과 시작

by FlIφEda 2022.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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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하늘의 달과 별이 단순히 하늘의 배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멀리 있는 실존 물체라는 것을 인지하고 난 이후부터 사람들은 그 먼 우주까지 닿을 수 있는 어떠한 수단이 있다면, 언젠가는 그곳을 여행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특히, 일부 소설가들은 이러한 아이디어와 소재를 기반으로 각종 공상 과학 소설과 판타지 소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그렇게 우주여행을 향한 인류의 꿈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이러한 꿈과 연관이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 한 채 간혹 전쟁에서 사용되었던 것들 중 하나가 로켓 무기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전에 만들어진 로켓은 중국에서 사용하던 비화창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1232년경에 개발되었습니다. 이 비화창의 한자는 ‘飛(날아가는)- 날 비’, ‘火(불)- 불 화’를 사용해 그 뜻 그대로 ‘날아가는 불창’을 뜻합니다. 창의 앞부분에 통을 매단 후 그 안에 화약을 넣은 상태로 발사를 하게 되고, 그로 인해 통 속의 화약이 격렬하게 타오르면서 뒤쪽으로 연소 가스가 분출되며, 그때의 반작용으로 인해 앞으로 날아가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중국에서 개발되어 최초의 로켓이 된 불화창은 이후 몽고군의 유럽 침략 때 사용되었고, 이를 계기로 하여 로켓의 기술이 서방세계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른 후 1903년, 러시아의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는 질량비, 분사 속도, 그리고 추진력 사이의 관계를 확립한 ‘반작용 모터를 이용한 우주공간 탐험’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습니다. 그리고 해당 논문은 본격적인 우주탐사의 역사를 시작시킨 시발점이 되었으며, 치올코프스키는 로켓 공학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1919년, 미국의 로버트 고더드는 ‘초 고공에 달하는 방법’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였고, 이를 통해 다단 로켓을 사용한다면 인간이 달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해진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그로부터 7년 후인 1926년에는 최초의 액체 로켓 발사 실험을 성공하였고, 해당 실험은 액체 연료의 추진 가능성을 증명할 수 있었던 중요한 실험이었습니다. 해당 액체 로켓의 비행시간은 2.5초였으며, 고도 12.5m까지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그의 이론은 맹렬한 비난을 받으며 생애 동안 업적을 인정받지 못하였으며, 결국 그의 연구는 사람들의 기억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로켓 무기를 개발하였고, 런던에 무인 공습을 가하기도 하였지만 로켓이 그들의 무기 체계에서 가진 역할은 아주 작고 미미했습니다. 같은 시기에 고다드 또한 미 해군을 위해 로켓 무기 개발을 위한 연구를 진행했으나 그 누구도 고다드의 연구 가치를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모두에게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던 그의 연구에 큰 관심과 흥미를 가진 자가 있는데, 그는 바로 나치 독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베르너 폰 브라운을 비롯한 여러 독일의 기술자들은 고다드가 연구한 이론을 기반으로 세계 최초의 장거리 탄도미사일인 V-2 로켓을 완성하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과 소련은 핵을 운반하는 운반체로서 로켓 무기의 중요한 역할을 인식하였고, 이를 계기로 V-2 로켓 개발에 참여했던 수많은 기술자들은 미국과 소련으로 흩어져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두 국가는 대륙간 탄도미사일인 ICBM을 경쟁적으로 개발했으며, 이러한 탄도탄의 개발은 궤도를 선회하는 인공위성의 발사로 이어졌습니다.

 

1957년 10월 4일, 소련은 전파를 발사하며 지구 주위의 궤도를 선회하는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를 성공적으로 발사했습니다. 소련의 스푸트니크 1호는 독일에서 개발되었던 4개의 V-2 로켓을 묶어서 발사했습니다. 미국은 냉전시대의 적국이자 경쟁국이었던 소련의 성공으로 인해 크게 자존심이 상하게 되었고, 때문에 우주 비행과 인공위성의 발사는 그 이후 정치적 경쟁의 수단으로써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소련의 주도로 시작된 우주 비행은 두 국가 간의 경쟁 속에서 개발되었기 때문에 그 성과가 최대한 단기간 안에 달성될 수 있도록 하는 효과적인 방법 속에 추진되었습니다. 그 당시, 미국의 우주 항공국에서 계획했던 우주 비행 프로그램은 초음속 비행으로 시작하여 우주 비행까지 이어지는 우주왕복선의 개념이었습니다. 하지만 소련의 성공에 자극을 받은 미국은 그들과의 경쟁을 위해 로켓을 이용한 우주선의 발사로 계획을 전면 수정했습니다. 게다가 보다 체계적인 국가적 통합체계를 기반으로 우주 비행 경쟁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기존의 국립항공자문위원회(NACA)를 독립 기구로 승격시켜 1958년 국립항공우주국(NASA)을 설립했습니다. 그렇게 국립항공우주국은 항공우주와 관련된 모든 비군사적 연구 개발에 초점을 맞춰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우주비행을 위한 연구와 개발이 활발하게 진행된 1960년대는 마치 과거 비행기 개발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1920년대와도 비슷했습니다. 미국과 소련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이루어지지 못했던 모든 새로운 기록에 먼저 도달하고 달성하기 위해 경쟁해가며 서둘러 우주선을 발사했습니다. 1961년 4월 12일, 소련은 유리 가가린을 태우고 최초의 유인 우주 비행을 실현했고, 그는 안정적으로 지구 궤도를 한 바퀴 돌고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그로부터 바로 다음 해, 미국은 성공적으로 존 H. 글렌을 태운 우정 7호를 발사했고, 이들은 지구의 궤도를 세 바퀴 회전하는 것에 성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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