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시대 속 미국과 소련 양국 간의 우주 비행에 대한 경쟁이 심화되고, 미국에서는 이를 정치적 경쟁의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여긴 만큼 당시 케네디 대통령은 미국이 1960년대 말까지 달에 인간을 보내고 말겠다는 정치적 선언을 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제미니 계획과 아폴로 계획 수립하였고, 두 계획에 기반하여 착실하게 추진해 나가며 달 여행을 성공시키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소련 또한 이에 지지 않고자 비슷한 계획을 세웠으며, 그렇게 두 나라는 장기 우주 체류 및 우주 유영, 그리고 우주 정거장의 건설과 같은 우주여행에 꼭 필요한 기본 실험들을 먼저 이루기 위해 쉼 없이 경쟁하였습니다. 그렇게 1966년, 소련은 무인 탐사선인 루나 9호를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달의 표면에 처음으로 연착륙시켜 무인 탐사를 진행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69년 7월 20일, 미국은 닐 암스트롱과 버즈 올드린, 그리고 마이클 콜린스를 태운 아폴로 우주선을 쏘아 올렸고, 그중 암스트롱과 올드린의 달 연착선이 달에 사뿐히 내려앉는 장면을 통신위성을 통해 전 세계에 중계했습니다. 이로써 두 국가의 달 여행에 대한 경쟁은 끝나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미국과 소련은 유인 우주 프로그램과 병행하여 달 탐사를 비롯해 태양계의 행성에 대한 탐사 활동까지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1960년대에 금성을 탐사하기 위해서 파이오니어 5호를 발사했으며, 1965년에는 매리너 4호를 이용해 화성의 근접 촬영을 성공적으로 이루었습니다. 그 후 1971년, 매리너 9호는 화성의 궤도에 진입하였고, 그 상태로 화성의 주변을 공전하면서 행성 표면의 약 70%를 촬영하여 지구로 전송하는 것에 성공했습니다. 반면 1967년 소련은 비너스, 즉 금성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의 베네라 4호를 금성에 연착륙시켰고, 그 후 1975년에는 베네라 9호가 최초의 금성 위성이 되어 선회하며 착륙선을 분리시켜 금성에 연착륙했습니다.
1976년, 미국의 바이킹 1호와 바이킹 2호는 화성의 위성이 되었고, 착륙선을 연착륙시켜 생물의 존재 여부를 알아보는 등 여러 실험을 비롯해 다양한 조사를 수행했습니다. 미국은 1978년 개척자라는 의미를 가진 파이오니어 12호와 13호를 이용해 금성을 탐사했습니다. 그리고 소련이 베네라 12호가 금성의 위성이 되어 선회하며 착륙선이 분리되었고, 다양한 조사와 실험을 위해 금성에 연착륙하여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미국의 보이저 1호는 1980년에 목성 근처 접근에 성공하여 목성 관측 사진을 보냈고, 보이저 2호는 다음 해인 1981년에 토성에 접근하는 것에 성공했습니다. 그 기세를 몰아 지속적인 시도 끝에 1986년에는 천왕성, 그리고 1989년에는 해왕성에 접근하는 데 성공했고, 이로써 보이저는 태양계를 벗어난 최초의 인공위성이 되었습니다.
사실 달에 사람을 보내기 위한 유인 우주 계획은 실용성과 경제적 타당성을 완전히 배제한 체, 오롯이 정치적인 목적 달성을 위해 수행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얻은 결과물은 단순 호기심을 만족시켜주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는 정치를 위한 무한경쟁이 얼마나 허망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보여주는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두 국가 모두 당시 세계의 기술을 선도하던 국가로서, 해당 개발을 바탕으로 얻게 된 많은 기술들은 다양한 산업에 영향을 주면서 세계의 전반적인 기술 개발 및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한편, 1962년 미국과 일본 사이에 전파 중계를 목적으로 발사된 릴레이 1호는 최초의 실용위성으로, 케네디 암살 사건을 일본에 중계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덧붙여 도쿄 올림픽을 미국에 중계하는데 큰 역할을 한 신콤 3호는 미국이 발사한 최초의 정지궤도 통신위성으로, 방송통신시대를 여는 중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후 1965년에는 첫 상용 통신위성인 인텔셋 1호가 발사되었고, 이는 정치적으로 이루어졌던 우주경쟁과는 다른 방식으로 꾸준한 발전을 거듭해 나가면서 현재는 전 세계를 하나의 통신망으로 연결하는 데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미국은 소련과의 우주 경쟁에서 승리한 뒤 실용성을 위하는 방향으로 방법을 바꿔 초기 초음속 시대에 구상된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을 재개해 1981년에 콜롬비아호의 실험을 시작했으며, 그로부터 약 1년 후 바로 실행 비행에 도전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86년 발사된 챌린저호는 발사 후 72초 만에 폭발하였고, 이로 인해 탑승하고 있던 승무원 7명이 전원 사망하는 참담한 사고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해당 사건이 발생한 직후 원인 규명과 문제에 대한 보완조치를 마련하는 것에만 약 2년 8개월이 걸렸습니다. 현재 우주왕복선은 상용화가 이루어졌고, 이는 위성의 발사 및 수리, 그리고 각종 군사활동 등에도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비록 과거의 소련도 우주왕복선에 대해 같은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 국가의 체제 붕괴로 인해 더 이상의 진전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여러 우주비행사들은 우주정거장을 짓고 우주에서 장기 체류를 해가며 우주에서의 다양한 실험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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